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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가사소송
이혼·가사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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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오늘]70대 부인, 90대 남편 상대로 이혼소송… 4년 만에 승소
17년 전 오늘… 칠순 할머니의 사이다 이혼
"다 늙어서 이혼 소송을 낸 이유는 늙어도 헤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데(그러지 못했다)…."(1999년 폭력과 외도를 일삼은 80대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낸 76세 부인의 인터뷰 중)
오랫동안 우리나라 가족 가치관의 핵심은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였다.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는 경제력 여부와 상관없이 집안 내에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90년대엔 여권 신장 목소리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주의와 여성 권리라는 가치관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말 황혼이혼이 급증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까지는 전통적 가족 구조를 거부하는 이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당시 한 법학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의 권위주의는 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 이혼사유가 된다면 한국 남자들은 모조리 이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시형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6·25전쟁 중 첫번째 남편과 사별한 그는 7년여 뒤 두번째 남편과 재혼했다. 하지만 재혼한 남편은 의처증이 심해 같이 산 40여년 동안 부인을 의심했다. 욕설은 물론 매일같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었지만 참고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남편에겐 친구도 없고 친척간 왕래도 없었다. 누군가 집에 찾아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까탈스러운 성격에 밖에서 식사하기도 쉽지 않아 늘 삼시세끼를 차려내야 했다.
의처증 때문에 돈 벌어오는 것 외에는 할머니가 밖에 나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도 없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산 세월은 사실상 감금생활이었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북한에 7남매를 두고 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편은 모자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아이가 생기면 낙태를 강요했고 3번의 낙태를 했다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17년 전 오늘… 칠순 할머니의 사이다 이혼
하루는 남편과 크게 다툰 후 집을 나왔지만 막상 갈 데가 없어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각방 생활을 했다. 어느 날은 결혼한 아들 내외 앞에서 폭언을 하고 "어머니를 데리고 가라"며 집에서 내쫓았다. 할머니 이름으로 돼 있던 재산까지 모조리 할아버지 앞으로 바뀌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첫번째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1심 판결에서 "이 갈등은 피고(할아버지)의 권위적인 태도와 구속에 시달린 원고(할머니)가 이를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하는 반면, 피고는 종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이를 제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시적'인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면서 "나이, 혼인기간, 생활양식 등을 고려할 때 결혼생활이 파탄 상태까지 이르게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할머니의 청구를 기각했다. 할아버지는 재판관에게 큰절을 하고 할머니와 잘 살겠다는 맹세를 했다.
할머니는 잠시나마 희망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반성문을 써오라며 할머니를 다시 쫓아냈다. 이후 할머니와 함께 모은 재산 36억원을 독단적으로 한 대학에 기증했다. 반면 할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남편 때문에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3년 뒤 할머니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 번째 소송에 임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법원은 "원고와 피고는 이미 40여년간 부부로 생활해왔고 피고 나이가 90세, 원고 나이도 70세가 넘었다"며 "특히 피고가 원고와의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며 남성중심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에게 "황혼의 여생을 해로하시라"는 덕담도 남겼다.
17년 전 오늘… 칠순 할머니의 사이다 이혼
할아버지는 당당했다. "100년을 따로 살아도 이혼할 이유가 없으면 안하는 거지, 왜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야단이야. 이 바보같은 것들…행복하게 살긴 뭘 행복하게 살아. 그저 늙은이가 밥 먹고 살면 되지. 특별한 게 뭐 있어?" 할머니의 변호사는 할아버지와 통화를 마치고 할머니의 인생을 짧게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9년 8월25일. 드디어 할머니의 꿈이 이뤄졌다. 서울고법 특별8부는 원심을 깨고 "두 사람은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다음해 대법원에서도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황혼이혼 소송 중 처음으로 승소한 사례였다.
재판부는 "남편이 부부문제를 대화와 설득으로 풀지않고 함께 모은 거액의 재산을 상의도 없이 대학에 기부하는 등 수십년간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고집한 점이 인정된다"며 "이로 인해 부인이 정신적 고통을 겪은 것이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밝혔다.
할머니는 이혼과 함께 위자료 5000만원과 재산분할액 현금 3억원, 부동산(시가 15억여원) 지분 3분의1도 받을 수 있었다.
17년 전 오늘… 칠순 할머니의 사이다 이혼
"다 늙어서 이혼 소송을 낸 이유는 늙어도 헤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데(그러지 못했다)…."(1999년 폭력과 외도를 일삼은 80대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낸 76세 부인의 인터뷰 중)
오랫동안 우리나라 가족 가치관의 핵심은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였다.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는 경제력 여부와 상관없이 집안 내에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90년대엔 여권 신장 목소리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주의와 여성 권리라는 가치관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말 황혼이혼이 급증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이때까지는 전통적 가족 구조를 거부하는 이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당시 한 법학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의 권위주의는 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 이혼사유가 된다면 한국 남자들은 모조리 이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시형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6·25전쟁 중 첫번째 남편과 사별한 그는 7년여 뒤 두번째 남편과 재혼했다. 하지만 재혼한 남편은 의처증이 심해 같이 산 40여년 동안 부인을 의심했다. 욕설은 물론 매일같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었지만 참고 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남편에겐 친구도 없고 친척간 왕래도 없었다. 누군가 집에 찾아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까탈스러운 성격에 밖에서 식사하기도 쉽지 않아 늘 삼시세끼를 차려내야 했다.
의처증 때문에 돈 벌어오는 것 외에는 할머니가 밖에 나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도 없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산 세월은 사실상 감금생활이었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북한에 7남매를 두고 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편은 모자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아이가 생기면 낙태를 강요했고 3번의 낙태를 했다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17년 전 오늘… 칠순 할머니의 사이다 이혼
하루는 남편과 크게 다툰 후 집을 나왔지만 막상 갈 데가 없어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각방 생활을 했다. 어느 날은 결혼한 아들 내외 앞에서 폭언을 하고 "어머니를 데리고 가라"며 집에서 내쫓았다. 할머니 이름으로 돼 있던 재산까지 모조리 할아버지 앞으로 바뀌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첫번째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1심 판결에서 "이 갈등은 피고(할아버지)의 권위적인 태도와 구속에 시달린 원고(할머니)가 이를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하는 반면, 피고는 종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이를 제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시적'인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면서 "나이, 혼인기간, 생활양식 등을 고려할 때 결혼생활이 파탄 상태까지 이르게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할머니의 청구를 기각했다. 할아버지는 재판관에게 큰절을 하고 할머니와 잘 살겠다는 맹세를 했다.
할머니는 잠시나마 희망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반성문을 써오라며 할머니를 다시 쫓아냈다. 이후 할머니와 함께 모은 재산 36억원을 독단적으로 한 대학에 기증했다. 반면 할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남편 때문에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3년 뒤 할머니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 번째 소송에 임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법원은 "원고와 피고는 이미 40여년간 부부로 생활해왔고 피고 나이가 90세, 원고 나이도 70세가 넘었다"며 "특히 피고가 원고와의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며 남성중심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에게 "황혼의 여생을 해로하시라"는 덕담도 남겼다.
17년 전 오늘… 칠순 할머니의 사이다 이혼
할아버지는 당당했다. "100년을 따로 살아도 이혼할 이유가 없으면 안하는 거지, 왜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야단이야. 이 바보같은 것들…행복하게 살긴 뭘 행복하게 살아. 그저 늙은이가 밥 먹고 살면 되지. 특별한 게 뭐 있어?" 할머니의 변호사는 할아버지와 통화를 마치고 할머니의 인생을 짧게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9년 8월25일. 드디어 할머니의 꿈이 이뤄졌다. 서울고법 특별8부는 원심을 깨고 "두 사람은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다음해 대법원에서도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황혼이혼 소송 중 처음으로 승소한 사례였다.
재판부는 "남편이 부부문제를 대화와 설득으로 풀지않고 함께 모은 거액의 재산을 상의도 없이 대학에 기부하는 등 수십년간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고집한 점이 인정된다"며 "이로 인해 부인이 정신적 고통을 겪은 것이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밝혔다.
할머니는 이혼과 함께 위자료 5000만원과 재산분할액 현금 3억원, 부동산(시가 15억여원) 지분 3분의1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