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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보상 - 바라보는 시각과 평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22-04-18 14:35 조회 : 784회 좋아요 : 3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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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보상은 제대 된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해방정국에서 제1공화국이 무너지기까지, 4.3사건에 대한 평가는 남로당을 위시한 좌파의 무장폭동에만 초점을 맞추어졌고 군경에 의하여 피살된 자는 모두 무장유격대원이거나 그 동조자라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1960년, 짧은 해방기에도 불구하고 4.3 사건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 희생자들을 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5.16 쿠데타 이후 20여년 동안 이어진 군사정권 속에서 그러한 논의는 다시 금기시되었다. 때문에 4.3사건에 대한 조사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에야 비로소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1993년 5월 김영삼은 "정부는 공인된 단체의 진상규명 작업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1999년 10월 한나라당의 제주 출신 국회의원 3명이 관련 특별법을 발의했다. 당시 여당이던 국민회의는 처음에는 특별법 발의에 부정적이었으나 반발이 거세지자 공동 발의로 선회했고, 국민의 정부가 집권 중이던 1999년 12월 15일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마침내 국회를 통과하였다.[45] 이후 참여정부 시절 국가적인 조사를 거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으며, 미군정의 기밀정보가 일부 해제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다른 역사적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4.3 사건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과 정치·사회적인 가치 판단의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4.3 사건이 (1) 무장폭동 내지는 인민봉기의 성격을 띄며 (2) 반란군·토벌군 쌍방이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사관과 민중사관 양측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예컨대 민중사관에 가까운 김종민의 제민일보 기고에서도 일단은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 및 서북청년단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사건"으로 규정한다. 반면 정치적 관점에서 '반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존 메릴의 학술논문에서도 토벌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들이 존재했음을 인정하고, 4.3사건을 "폭력이 얼마나 빠르게 증식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예시"라고 평했다. 또한 진행 과정에서 (3) 공산주의자들의 상당한 영향력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대체로 인정[46]된다.

삼일절 사건과 4.3사건에서 남로당의 역할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나, 이것이 조직적인 개입이었는지 단순 가담이었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다. 가령 1994년 제민일보 기사에서는 남로당 중앙지령설을 거짓으로 결론지으며 북한 지향적인 성격을 부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예컨재 삼일절 시위 준비위원회에 우익 인사들과 관공서 및 검경 관계자들도 참여한 사실[47]을 근거로 제시한다. 삼일절 사건의 초기 시위 목적은 단순히 광복을 기념하고 정치적 혼란의 빠른 종식을 기원하는 자리였으므로, 좌우가 모두 참여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후 사태의 양상을 반정부 극좌 폭력 봉기로 바꿔놓은 책임은 남로당에 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으며, 이러한 관점에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지령서 및 초기 인민위원회 무장대 지도자들이 월북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48]

한편, 제주도의 좌파 진영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동기로는 "미군정 및 서북청년단같은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의 탄압을 거치며 위기감을 느낀 좌파 진영에서 선제공격을 가했다"는 것이 일단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평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있으며, 단순한 좌우의 이분법을 넘어 같은 진영 내에서도 어디에 중점을 두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있다.[49]


[ 폭동·반란론 (≒북한 지향의 항쟁론) ]

보수주의 우파 진영에서는 4.3 사건을 남로당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반대한민국 반란으로 간주[50][51][52]한다.
제주도 남로당 세력은 이미 동해의 삼일절 기념행사에서도 시위를[53] 기획·실행[54][55][56][57]하였으며, 대구에서도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발생한 사망자를 명분으로 대규모 무장 봉기를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특히 삼일절 사건에서는 "박헌영 체포령 철회"나 "토지문제의 인민적 해결"[58]같은 극좌적인 구호들이 등장했으며, "사회노동당을 위시한 일체의 기만적 회색분자들과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를 소탕"할 것을 주장[59] 하는 등 반민주적 지향[60]을 분명히 드러냈다. 같은 맥락에서 4.3 사건에서도 남로당에 의해 불온삐라가 뿌려졌으며, "남한의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질서를 파괴하고 미군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투쟁 방편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61] 실제로 1948년 4월에서 5월 동안 <조선중앙일보>를 위시한 극좌신문들은 4·3 사건을 항쟁 내지는 인민봉기로 보도했으며, 따라서 조직적이며 고도로 정교한 이데올로기성을 띤 친북, 친공산주의적 성격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62][63]
또한 이들은 4.3 사건 당시의 주요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남한의 단독정권 수립 반대[64][65]였으며, 이것이 해당 시점에서는 남로당의 공식 노선이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한다.[66] 물론 한반도의 통일정부수립 주장 자체가 비판점은 아니다.[67] 그러나 이미 북한에 소련의 괴뢰정권 수립이 확실시되던 상황[68]에서, 평화적인 의견표출도 아니고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건 남한은 무정부 상태로 남아 있다가 공산화되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의 선전물들을 볼 때 남로당은 남한의 합법정부였던 미군정(~1948)과 대한민국(1948~)이 추구하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거부하는 반란 행위를 모색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69] 유엔에서 요구한 한반도 총선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북한과 김일성이지 남한의 이승만이 아니다.[70]
한편, 북한에서는 4.3 사건을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민중들이 친북 좌익정당들의 지도 아래 벌인 항쟁"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대한민국의 반란론과 동일하다. 남북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주적인지라, 북한의 친남한 민중봉기는 북한 입장에선 반란이고 남한의 친북 민중봉기는 곧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반란이다. 쉽게 말해 ‘공산폭동’이 4·3에 대한 미군과 대한민국 우파의 입장이라면,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북한 및 좌익세력의 인식이 된다.[71]


[ 적극적 항쟁론 ]

전통적으로 좌파 진영에서는 4.3 사건을 미군과 지배세력이 추구하던 한반도의 분단 과정에 저항한 제주도민들의 항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북한과의 연계성은 부정하지만, 친일척결·토지분배·자주통일 등 기타 좌파 민족주의적인 성격은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계엄령의 절차적 하자 등을 들어 이승만 정부의 토벌이 오히려 불법적이었다고 주장한다.[72]
적극적 항쟁론은 다시 통일운동·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반외세-반분단 항쟁론과, 제주도의 정서적·지정학적 특수성을 중시하는 제주도 항쟁론으로 나뉘어진다.
전자의 경우 ‘반민족적, 분단지향적’ 선거를 무산시킨 제주도민의 항쟁을 "통일정부를 갈망하는 민중의 의지를 대변"[73]한다고 평가하며, [74], 4.3 사건의 전조였던 삼일절 항쟁이나 3.10 총파업 역시 남로당의 불법성보다는 미군정의 강경한 탄압과 우파의 정치적 폭력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후자의 경우 4.3 사건을 해방정국의 좌우 이념갈등 요소보다는 제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나선 투쟁으로 평가한다. 제주도는 이미 일본 제국의 결7호 작전과 해방 이후 대량의 귀국자 문제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비록 일시적이었다지만 대(對)한국 경제순환 전략의 일환으로 쌀을 강제로 공출해갔으며, 이는 첫 1년여 간 미군정에 우호적이던 인민위원회를 위시한 제주 내 좌파 단체들이 서서히 노선을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75] 여기에 제주 지역의 도 승격 문제가 결정타를 가했다. 제주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육지의 정치에서 소외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이 강했기에[76], 섬 전체를 전라도에 귀속시키려는 미군정의 행정 개편안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4.3 사건은 "거대한 외압에 대한 지역민의 저항"으로 바라봐야 하며, "제주도민의 공동체적 특수성"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77]


[ 자위적 항쟁론 (≒국가폭력론) ]

주로 좌우를 막론하고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제기되는 관점이다. 4.3 사건을 극우세력의 횡포와 국가폭력에 맞서 싸운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바라보며, 이념적 대의보다는 희생자들에게 주목하는 관점이다.
김종민으로 대표되는 시각이다. 김종민은 미군정과 토벌대의 책임을 지적하며 사건의 전체 과정 중에 ‘항쟁’의 시기가 분명히 있긴 하다고 주장하면서도, 4.3의 전체 과정을 단계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항쟁과 대학살 시기가 분명히 나눠지기 때문에 이를 전체적으로 ‘항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4.3은 서북청년단 등에 의한 탄압의 국면, 이에 대한 항쟁의 국면, 이후의 대학살 국면으로 나뉜다. 즉, 4월 3일 봉기 자체는 과거의 민란과 같은 저항적 성격을 띄고있지만, 무장대에 의한 학살을 포함한 대학살 국면을 고려하면 4.3을 항쟁으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 예컨대 삼일절 발포 사건에서도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제주도 민•관 합동 파업에 고문치사 사건 등의 폭력적 대처로 일관하며 일을 키운 것은 미군정 및 우파 정부조직이었음을 지적하며, 시위대의 폭력은 그에 맞선 자위권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종민은 “4.3의 경우 가장 먼저 내세운 구호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였던 만큼 먼 훗날 통일이 된다면 ‘통일운동’이라는 취지의 명칭이 부합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관련기사 1 관련기사 2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자위적 항쟁론·국가폭력론에 가깝다. 즉, 좌우 가치판단의 영역인 4.3 사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보류하되, 4.3 사건 도중 저질러진 국가폭력에 대해서는 사죄하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에도 역사적인 평가는 시대에 따라 합의된 선을 기준으로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 등 민주당에서도 NL계 운동권과 밀접한 정부들은 자위적 항쟁론에 더해 4.3 사건의 정치적 대의마저 긍정하려는 적극적 항쟁론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며, 반대로 반공주의·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보수 정부들은 국가폭력은 인정하되 반란군에 의한 학살과 공산봉기의 반체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편이다.[78]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집단들과 달리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 피해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겪은 상황을 담담하게 기술한 소설가 현길언 교수의 글 전문을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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