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보상 - 무장반란부터 집단학살 전체 전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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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무장반란과 집단학살
[ 무장반란과 충돌 ]
제주 민관총파업까지만 해도 (비록 어느 정도는 남로당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각 진영의 온건파에게도 호응을 얻은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제주도에는 생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자,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1]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반란은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 인사를 습격해 군경은 일동 긴장하였다.
4월 3일, 이 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결호작전을 위해 갖고왔다 놓고간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 등 소화기와 군도와 대검 등 칼, 죽창, 몽둥이뿐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경찰이 노획한 무장대의 무기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2] 그리고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공격하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소극적인 경비대를 의심하고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보내려 했다.
제주 4.3 사건 보상
[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 사건 ]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지며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3]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4][5]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전단에서 김익렬은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면서 무장대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대형사건이 터지고 만다.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 사건'이라고 한다.[6]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 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7] 현재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반란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온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는 일이 터졌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제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반란과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은 이 반란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해댔다.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8]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 선거 보이콧과 무력충돌 ]
평화협상이 깨지자 무장대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가 코앞이었기에 무장대는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거사무소와 선거관리위원들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피살당했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되거나 소각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제주도의 최종 선거인 등록률은 64.9%에 불과했다.[9] 선거위원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군경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랐다. 군경은 무장대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와중에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이어져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거 날인 5월 10일이 되자 무장대는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지도에 따라 한라산이나 오름에 올라가 생활하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 하산했다. 동시에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니 마을에는 군경, 군경 가족,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투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투표소가 불타거나 담당자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대대적인 선거 보이콧으로 인해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하고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재선거는 1년 이후에야 치뤄질 수 있었다.
선거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주도의 선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군경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가속화했다. 5월 20일 경, 미 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을 천명했다. 또한 그는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10]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도 그러한 강경진압에 한 몫 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소외시키고 육지에서 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11][12] 브라운과 박진경의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마을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었다.[13] 이런 무차별 체포작전으로 박진경은 두 달만에 대령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도 마찬가지로 무장대를 진압한다며 민간인들을 탄압했다. 무장대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좌익 혐의자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8년 6월 18일,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은 끝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을 포함해 9명이었다. 재판에서 검찰은 이들이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라고 말하며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키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므로 죽였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당했다. 이후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박진경의 뒤를 이어 강경 진압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하여 계속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왔으나 최경록의 말처럼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 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8년 7월 경 들어 무장대도 적극적인 공격을 삼가고, 제주도민들의 여론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계속 요구하며 진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7월 15일 경비대 제9연대가 부활하여 송요찬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실시했고[14], 총책 김달삼이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월북하면서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16]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7]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산간마을[18]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놓았고, 또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9]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20]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군경토벌대[21]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22] 그런가 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23],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24]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25]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26]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주민 10명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군주둔소를 찾아갔으나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9명을 무참히 살해한 후[27], 북촌리에 나타났다. 군인들은 북촌리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우는 등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28]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29]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고 이 일로 300~46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30],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 현상이었다고 한다.[31]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 수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34]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35][36]#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 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로 추정된다.[37][38]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시간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다음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증언들이다.
제주 4.3 사건 보상
[ 무장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 ]
[1] 한편 박갑동은 '제주 4.3은 북한 공산당 주도 폭동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른바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제주도 지역신문사인 제민일보에서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에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이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일본 도쿄에 가서 취재, 인터뷰해본 결과 박갑동 자신도 '나도 그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극우 세력에서는 박갑동의 첫 주장을 계속 유포하고 있다.
[2] 일본군 한 명의 보병장비를 여럿이 나눠서 한명은 소총, 한명은 권총, 한명은 군도, 한명은 대검... 식으로 무장했다. 한편 수통이나 철모, 반합, 전투화등 비전투 장비는 민가로 넘어가 바가지나 물통, 솥, 신발등 세간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다랑쉬 굴에서 그 일부가 유물로 발견되었다.
[3] 한국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 김익렬 대령(4.3 당시 중령)으로, 이후 한국전쟁 내내 용감히 싸워 기량을 인정받은 우수한 장교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 내내 진급은 했으나 한직을 주로 거치다가 박정희 집권 이후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남긴 4.3 관련 회고록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4] 사실 미군정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프리시 딘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본격적인 진압 작전 이전에 무장대와의 교섭을 추진했다. 맨스필드 중령은 이 말을 듣고 제주도의 주요 유지(도지사, 경찰청장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이들은 핑계를 대며 거부했고, 결국 김익렬에게 와서 그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5] 한편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이러한 평화협상 제의와 진행을 마냥 지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지는 사태에 대해 서둘러 진압하라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협상 직전 이틀 동안 미군은 무장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첩보활동을 하기도 했다.
[6] 이 사건을 촬영한 필름이 현재 남아 있다. 여담 항목 참고.
[7] 이 사건도 여명의 눈동자에 묘사된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가명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8] 김익렬의 수기에 따르면 난장판이 된 회의실에서 안재홍 민정장관이 자신을 말리며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그런가하면 송호성은 "이놈! 이놈!"거렸지만 그 말을 하는 대상이 조병옥인 것 같았다고 한다. 나중에 김익렬이 송호성을 만났을 때, 그는 "제주도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한탄했다.
[9] 당시 전국 평균 등록률이 91.7%이었으니 턱없이 낮은 것이었다.
[10] 그의 상관인 미 6사단장 워드는 제주도에서의 사태가 공산주의 선동의 문제만은 아님을 충고했지만, 브라운은 "경찰의 잔악성과 비효율적인 정부도 원인이었지만 본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에 비하면 지엽적인 원인"이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11] 제주 출신으로 당시 11연대 소속이었던 한 군인은 훗날 "우리는 서자 취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 놈은 다 빨갱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슬포 대대(제주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토벌도 시키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2] 문제는 이렇게 육지사람들만으로 토벌대가 구축되다보니 더욱 더 상황은 악화되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소통의 부제였는데, 당시 10월 사건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압하러온 전라도 군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거기다 제주도 방언은 육지사투리와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13] 다행히 이 때에는 집단학살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며 사람들을 연행하는 행위 자체가 무고한 피해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군경은 인식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러한 무차별 체포로 인해 일부 젊은이들은 자진하여 무장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14] 사실 이 선거는 공개적으로 치뤄지기에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무장대는 거의 강제적으로 주민들에게 '백지날인'을 요구해 받아냈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군경에 의해 살해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5] 즉, 섬 바닷가에서 산으로 5km만 들어가면 무조건 초토화라는 소리였다. 당시 제주도는 섬이긴 했어도 조선시대부터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하여서 어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산 중간층에서 밭을 이루고 살아가는 소농들이 해안선에 몰려 사는 사람만큼이나 많았던 시기이다. 이런 섬에서 해안선을 제외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킨다는건, 진압대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러나 해안마을 중에서도 곤을동처럼 피해를 입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탁상행정의 말로는 죄 없는 수만 명의 죽음이었다.
[16] 이것은 제주 4.3 사건에 있어서 미국의 책임 문제와 연결된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1949년 6월경에 이루어졌는데, 1948년 말부터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17]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소문은 완전히 근거 없는 낭설이었으며, 강경 진압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8] 제주도에는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이 있는데, '중산간마을'은 산 쪽에 위치하여 있는 마을을 말한다.
[19] 계엄령과 관련된 법률인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된다.
[20] 언론인도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이었던 현인하는 헌병대의 경향신문사 조사를 거부했다가 처형당했다.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도 비슷한 이유로 살해됐다. 1948년 11월에는 군경이 대놓고 검열을 하며 언론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했다.
[21] 이 때 파견된 경찰 중에서 경무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작전과장 최치환 총경이 작전참모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최치환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최고위원의 장인이다.
[22]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안공림(58) 씨는 8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는데,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증언했다...
[23] 토벌대였던 제2연대 특공대 장병들이 무장대로 변장한 사진이 남아있다. 실제 사진 그 사진에는 "폭도(暴徒)로 가장(假裝)코"란 글이 선명하게 적혀져 있다.
[24] 대살은 중산간지대뿐만 아니라 해안지대에 대피한 사람일지라도 처형 대상이 되었다.
[25] 이 말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 눈에 띄었다간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어 자신도 끌려가 죽을 수 있을 테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26] 얼마나 잔혹했냐면 같은 우익들마저도 그들을 외면했다. 실제로 그들이 민간인이라 할지언정 6.25 전쟁, 혹은 그 후에 벌인 짓들을 보면 전쟁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
[27] 1명은 경찰가족이라 제외되었다.
[28] 목격자에 증언에 따르면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열심히 빨았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29]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으로 근무하다 운전요원으로 차출되었던 한 경찰관은 이 사건에 대해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으니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되었다고 한다.
[30] 세계사적으로도 한 마을이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드물다고 할 정도다.
[31]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언론이 북촌리에서의 학살을 보도했는데, 당시 이 마을의 남녀 유권자 비율이 3대 1에 가까울만큼 남자들이 희소했다고 전할 정도였다.
[32]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 ~ 1962)는 제주시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제주지역의 유림들과 교류하던 한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아들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에게 호소문을 보내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에는 '이승만 성토문'이라는 글을 써서 "옛날 항적은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죄수 수십만여 명을 죽였으니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어떠한가"라며 이승만을 규탄하기도 했다. #
[33] 이분의 아들이 그 유명한 원희룡이다.
[34]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몰려사는 이유로 흔히 해안가에 물이 존재해서 그렇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중산간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중산간 일대에 나름의 반촌 성격의 집성촌이 많았었기에. 하지만 4.3사건을 겪으면서 죄다 초토화되었고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지금껏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다.
[35] 이렇게 서북청년단 중에서도 의인이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배우지 못했거나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북청년단의 전신적인 단체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조금 잘 살거나 주민들에게 밉보여 김일성에게 땅, 집 등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친목단체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38선 이북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증오, 남한마저 공산화당하면 말그대로 조국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면서 공산주의를 극도로 배척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도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이자, 이데올로기로 인해 고통받는 또 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점들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36] 이 의로운 사람들은 현재 제주 4.3 평화기념관 내에 위치한 '의인관'에 그 행적이 알려지고 있다.
[37] 대략 3,000~6,000명선
[38]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 지대의 마을들에서는 돌로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세워 방어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39] 4.3 사건의 피해자인 작가 현기영 쓴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따르면 이덕구의 셔츠 주머니에는 숟가락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토벌대가 빈정거리듯 꽂은 것 같다고.
[40] 1949년 3월 2일에 제주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유재흥이 사령관에, 함병선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재흥은 3월 마지막 주에 제주도에 왔으므로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앞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중간산마을과 무장대는 모두 궤멸 상태에 직면해 있었으니 선무공작을 펼쳐도 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유재흥은 피난민 20,000여 명과 무장대 250여 명이 산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을 하산시킬 작전을 짰다. 그 이전은 함병선이 전투사령부를 이끌었다. 함병선은 "온건 완화 작전을 취하여 오던 국군은 최후적 결의를 갖고 제3단계인 무력소탕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3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의 일대 섬멸전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41] 현재의 제주 관덕정과 제주관아 앞.
[42] 이들은 남녀 각 1명으로 남성대원은 오원권(농민), 여성대원은 한순애였다. 붙잡힌 직후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이미 4.3사건의 진압 방식도 유재흥이 부임한 후에는 학살보다는 귀순공작 위주로 진행되었고, 경찰 내부에서 4.3에 대한 감정도 누그러졌으며, 4.3사건이 6.25, 이승만의 정치공작 등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사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혔기에 열성 남로당원이 아닌 평범한 양민이었기에 감안되어 전향서를 제출하고 사면되었다고 전해진다.
[43] 제주는 특성상 쌀 농사가 힘들었고 대부분은 보리로 주식을 삼았다.
제주 4.3 사건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 무장반란과 충돌 ]
제주 민관총파업까지만 해도 (비록 어느 정도는 남로당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각 진영의 온건파에게도 호응을 얻은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제주도에는 생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자,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1]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반란은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 인사를 습격해 군경은 일동 긴장하였다.
4월 3일, 이 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결호작전을 위해 갖고왔다 놓고간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 등 소화기와 군도와 대검 등 칼, 죽창, 몽둥이뿐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경찰이 노획한 무장대의 무기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2] 그리고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공격하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소극적인 경비대를 의심하고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보내려 했다.
제주 4.3 사건 보상
[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 사건 ]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지며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3]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4][5]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전단에서 김익렬은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면서 무장대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대형사건이 터지고 만다.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 사건'이라고 한다.[6]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 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7] 현재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반란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원들이 마을로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온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는 일이 터졌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이제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반란과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은 이 반란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해댔다.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8]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 선거 보이콧과 무력충돌 ]
평화협상이 깨지자 무장대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가 코앞이었기에 무장대는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거사무소와 선거관리위원들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피살당했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되거나 소각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제주도의 최종 선거인 등록률은 64.9%에 불과했다.[9] 선거위원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군경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랐다. 군경은 무장대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와중에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이어져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거 날인 5월 10일이 되자 무장대는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지도에 따라 한라산이나 오름에 올라가 생활하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 하산했다. 동시에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니 마을에는 군경, 군경 가족,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투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투표소가 불타거나 담당자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대대적인 선거 보이콧으로 인해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하고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재선거는 1년 이후에야 치뤄질 수 있었다.
선거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주도의 선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군경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가속화했다. 5월 20일 경, 미 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을 천명했다. 또한 그는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10]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도 그러한 강경진압에 한 몫 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소외시키고 육지에서 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11][12] 브라운과 박진경의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마을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었다.[13] 이런 무차별 체포작전으로 박진경은 두 달만에 대령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도 마찬가지로 무장대를 진압한다며 민간인들을 탄압했다. 무장대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좌익 혐의자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8년 6월 18일,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은 끝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을 포함해 9명이었다. 재판에서 검찰은 이들이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라고 말하며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키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므로 죽였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당했다. 이후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박진경의 뒤를 이어 강경 진압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하여 계속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왔으나 최경록의 말처럼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 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8년 7월 경 들어 무장대도 적극적인 공격을 삼가고, 제주도민들의 여론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계속 요구하며 진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7월 15일 경비대 제9연대가 부활하여 송요찬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실시했고[14], 총책 김달삼이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월북하면서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16]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 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7]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중산간마을[18]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놓았고, 또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9]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20]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군경토벌대[21]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22] 그런가 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23],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가 대신 죽여버리는 '대살(代殺)'과[24]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25]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26]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주민 10명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군주둔소를 찾아갔으나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9명을 무참히 살해한 후[27], 북촌리에 나타났다. 군인들은 북촌리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우는 등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 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28]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명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29]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고 이 일로 300~46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30],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 현상이었다고 한다.[31]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 수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34]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35][36]#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 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로 추정된다.[37][38]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시간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다음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증언들이다.
제주 4.3 사건 보상
[ 무장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 ]
[1] 한편 박갑동은 '제주 4.3은 북한 공산당 주도 폭동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른바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제주도 지역신문사인 제민일보에서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에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이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일본 도쿄에 가서 취재, 인터뷰해본 결과 박갑동 자신도 '나도 그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극우 세력에서는 박갑동의 첫 주장을 계속 유포하고 있다.
[2] 일본군 한 명의 보병장비를 여럿이 나눠서 한명은 소총, 한명은 권총, 한명은 군도, 한명은 대검... 식으로 무장했다. 한편 수통이나 철모, 반합, 전투화등 비전투 장비는 민가로 넘어가 바가지나 물통, 솥, 신발등 세간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다랑쉬 굴에서 그 일부가 유물로 발견되었다.
[3] 한국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 김익렬 대령(4.3 당시 중령)으로, 이후 한국전쟁 내내 용감히 싸워 기량을 인정받은 우수한 장교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 내내 진급은 했으나 한직을 주로 거치다가 박정희 집권 이후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남긴 4.3 관련 회고록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4] 사실 미군정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프리시 딘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본격적인 진압 작전 이전에 무장대와의 교섭을 추진했다. 맨스필드 중령은 이 말을 듣고 제주도의 주요 유지(도지사, 경찰청장 등)에게 협조를 요청했지만 이들은 핑계를 대며 거부했고, 결국 김익렬에게 와서 그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5] 한편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이러한 평화협상 제의와 진행을 마냥 지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지는 사태에 대해 서둘러 진압하라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협상 직전 이틀 동안 미군은 무장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첩보활동을 하기도 했다.
[6] 이 사건을 촬영한 필름이 현재 남아 있다. 여담 항목 참고.
[7] 이 사건도 여명의 눈동자에 묘사된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가명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8] 김익렬의 수기에 따르면 난장판이 된 회의실에서 안재홍 민정장관이 자신을 말리며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그런가하면 송호성은 "이놈! 이놈!"거렸지만 그 말을 하는 대상이 조병옥인 것 같았다고 한다. 나중에 김익렬이 송호성을 만났을 때, 그는 "제주도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고 한탄했다.
[9] 당시 전국 평균 등록률이 91.7%이었으니 턱없이 낮은 것이었다.
[10] 그의 상관인 미 6사단장 워드는 제주도에서의 사태가 공산주의 선동의 문제만은 아님을 충고했지만, 브라운은 "경찰의 잔악성과 비효율적인 정부도 원인이었지만 본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에 비하면 지엽적인 원인"이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11] 제주 출신으로 당시 11연대 소속이었던 한 군인은 훗날 "우리는 서자 취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 놈은 다 빨갱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슬포 대대(제주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토벌도 시키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2] 문제는 이렇게 육지사람들만으로 토벌대가 구축되다보니 더욱 더 상황은 악화되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소통의 부제였는데, 당시 10월 사건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압하러온 전라도 군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거기다 제주도 방언은 육지사투리와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13] 다행히 이 때에는 집단학살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며 사람들을 연행하는 행위 자체가 무고한 피해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군경은 인식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러한 무차별 체포로 인해 일부 젊은이들은 자진하여 무장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14] 사실 이 선거는 공개적으로 치뤄지기에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무장대는 거의 강제적으로 주민들에게 '백지날인'을 요구해 받아냈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군경에 의해 살해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5] 즉, 섬 바닷가에서 산으로 5km만 들어가면 무조건 초토화라는 소리였다. 당시 제주도는 섬이긴 했어도 조선시대부터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하여서 어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산 중간층에서 밭을 이루고 살아가는 소농들이 해안선에 몰려 사는 사람만큼이나 많았던 시기이다. 이런 섬에서 해안선을 제외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킨다는건, 진압대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러나 해안마을 중에서도 곤을동처럼 피해를 입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탁상행정의 말로는 죄 없는 수만 명의 죽음이었다.
[16] 이것은 제주 4.3 사건에 있어서 미국의 책임 문제와 연결된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1949년 6월경에 이루어졌는데, 1948년 말부터 제주도에서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17]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소문은 완전히 근거 없는 낭설이었으며, 강경 진압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8] 제주도에는 '해변마을'과 '중산간마을'이 있는데, '중산간마을'은 산 쪽에 위치하여 있는 마을을 말한다.
[19] 계엄령과 관련된 법률인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된다.
[20] 언론인도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이었던 현인하는 헌병대의 경향신문사 조사를 거부했다가 처형당했다.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도 비슷한 이유로 살해됐다. 1948년 11월에는 군경이 대놓고 검열을 하며 언론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했다.
[21] 이 때 파견된 경찰 중에서 경무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작전과장 최치환 총경이 작전참모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최치환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최고위원의 장인이다.
[22]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 사는 안공림(58) 씨는 8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는데,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증언했다...
[23] 토벌대였던 제2연대 특공대 장병들이 무장대로 변장한 사진이 남아있다. 실제 사진 그 사진에는 "폭도(暴徒)로 가장(假裝)코"란 글이 선명하게 적혀져 있다.
[24] 대살은 중산간지대뿐만 아니라 해안지대에 대피한 사람일지라도 처형 대상이 되었다.
[25] 이 말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 눈에 띄었다간 공연히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어 자신도 끌려가 죽을 수 있을 테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26] 얼마나 잔혹했냐면 같은 우익들마저도 그들을 외면했다. 실제로 그들이 민간인이라 할지언정 6.25 전쟁, 혹은 그 후에 벌인 짓들을 보면 전쟁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
[27] 1명은 경찰가족이라 제외되었다.
[28] 목격자에 증언에 따르면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열심히 빨았는데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29]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으로 근무하다 운전요원으로 차출되었던 한 경찰관은 이 사건에 대해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으니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되었다고 한다.
[30] 세계사적으로도 한 마을이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드물다고 할 정도다.
[31]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언론이 북촌리에서의 학살을 보도했는데, 당시 이 마을의 남녀 유권자 비율이 3대 1에 가까울만큼 남자들이 희소했다고 전할 정도였다.
[32]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 1888 ~ 1962)는 제주시 칠성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제주지역의 유림들과 교류하던 한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아들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에게 호소문을 보내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에는 '이승만 성토문'이라는 글을 써서 "옛날 항적은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살해하였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이 나라 안 죄수 수십만여 명을 죽였으니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어떠한가"라며 이승만을 규탄하기도 했다. #
[33] 이분의 아들이 그 유명한 원희룡이다.
[34]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몰려사는 이유로 흔히 해안가에 물이 존재해서 그렇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중산간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중산간 일대에 나름의 반촌 성격의 집성촌이 많았었기에. 하지만 4.3사건을 겪으면서 죄다 초토화되었고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지금껏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많다.
[35] 이렇게 서북청년단 중에서도 의인이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단순히 배우지 못했거나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북청년단의 전신적인 단체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조금 잘 살거나 주민들에게 밉보여 김일성에게 땅, 집 등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친목단체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38선 이북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증오, 남한마저 공산화당하면 말그대로 조국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면서 공산주의를 극도로 배척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도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들이자, 이데올로기로 인해 고통받는 또 다른 역사의 피해자들이었다. 물론 그러한 점들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36] 이 의로운 사람들은 현재 제주 4.3 평화기념관 내에 위치한 '의인관'에 그 행적이 알려지고 있다.
[37] 대략 3,000~6,000명선
[38]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안 지대의 마을들에서는 돌로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세워 방어를 하는 일도 빈번했다.
[39] 4.3 사건의 피해자인 작가 현기영 쓴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따르면 이덕구의 셔츠 주머니에는 숟가락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토벌대가 빈정거리듯 꽂은 것 같다고.
[40] 1949년 3월 2일에 제주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유재흥이 사령관에, 함병선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재흥은 3월 마지막 주에 제주도에 왔으므로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앞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중간산마을과 무장대는 모두 궤멸 상태에 직면해 있었으니 선무공작을 펼쳐도 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유재흥은 피난민 20,000여 명과 무장대 250여 명이 산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민들을 하산시킬 작전을 짰다. 그 이전은 함병선이 전투사령부를 이끌었다. 함병선은 "온건 완화 작전을 취하여 오던 국군은 최후적 결의를 갖고 제3단계인 무력소탕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3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의 일대 섬멸전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41] 현재의 제주 관덕정과 제주관아 앞.
[42] 이들은 남녀 각 1명으로 남성대원은 오원권(농민), 여성대원은 한순애였다. 붙잡힌 직후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이미 4.3사건의 진압 방식도 유재흥이 부임한 후에는 학살보다는 귀순공작 위주로 진행되었고, 경찰 내부에서 4.3에 대한 감정도 누그러졌으며, 4.3사건이 6.25, 이승만의 정치공작 등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사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혔기에 열성 남로당원이 아닌 평범한 양민이었기에 감안되어 전향서를 제출하고 사면되었다고 전해진다.
[43] 제주는 특성상 쌀 농사가 힘들었고 대부분은 보리로 주식을 삼았다.
제주 4.3 사건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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